신라사회 신분제 골품제 뼈에도 품격이 있다?! | 골품제

신라사회 신분제 골품제 뼈에도 품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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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중앙집권 국가 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을 규합하게 됩니다. 
이때 엄격한 신분제도가 완성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신라 신분제의 근간인 ‘골품제’입니다.
즉 골제와 품제가 바로 골품제입니다.
이는 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로 정치와 사회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칩니다. 
골품제는 크게 3가지 계층으로 나눠볼수 있습니다.
왕족인 성골과 진골, 귀족층인 6두품, 5두품, 3두품, 마지막으로 평민계층인 3두품이하 입니다.
골품에 따라 관직도 제한이 있었는데, 가령 6두품은 아찬, 5두품은 대나마, 4두품은 대사 까지 진출할수 있었습니다.
신라의 유명한 유학자인 최지원도 6두품이었습니다. 결국 통일신라 이후 신라가 멸망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 또한 골품제 였습니다.
망국의 편입된 귀족이었던, 김서현, 김유신 일가와 비운의 반쪽 왕족이었던 김춘추의 의기투합을 통해, 
상대적으로 성골에 비해 차별받던 진골에 비애를 볼수 있습니다. 
김춘추가 진골출신으로 처음으로 왕에 오른데, 이어 신라는 진골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훗날 역사학자들이 성골, 진골의 구분방식도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들을 내어놓습니다.
성골과 성골이 결혼을 하여 자손을 낳으면 성골이고
성골과 진골이 결혼하여  자손을 낳으면 진골이됩니다.
진골과 진골이 결혼하면 마찬가지로 진골이 되구요.
특별히 가야계 황족들은 규합과정에서 진골로 편입시켜줍니다. 
쉽게말해서 성골, 진골까지는 왕족, 그리고 그이하로 나눠볼수도 있겠네요?
특별히 ‘족강’이라 하여서 왕이 폐위되거나 했을 때, 대대로 신분이 진골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신라 왕족은 자신들의 ‘순혈 혈통’을 계승하고자, 근친을 권장하였는데, 이는 비단 신라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이밖에 많은 문명권에서 볼수 있는 현상입니다.
따라서 현대인의 시각으로 이것을 미개하다 라고 평할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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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사회 신분제 골품제 뼈에도 품격이 있다?!

[쉬운 글영상] 신라 골품제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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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글영상] 신라 골품제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만나다] 2부 신라 왕권 양날의 칼, 골품제도 / YTN 사이언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강력한 신분제, 골품제도!
건국초기, 신라는 6개 부족이 연합하여 성립한 연합부족체제였다.
그렇다보니, 귀족들의 세력에 왕의 권한이 좌지우지되는 불안한 정세를 보였는데…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신라 왕족은 폐쇄적인 신분제를 골품제를 정립하였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을 그 외 귀족들에게 6두품에서 4두품을 평민에게는 3두품에서 1두품이라는 차등을 두어 사회진출의 벽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1986년에 발굴된 경주시 용강동 고분에서는 다양한 인물 토용이 발굴되었는데…
여기서 신라는 신분제별 독특한 복식제도가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당시 신라인들에게는 신분별, 주거지, 복식 등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 것이다.
외관만 보더라도 뚜렷이 신분제를 알 수 있도록 제정한 것이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통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성골신분을 통해 안정적인 왕권 강화를 이뤄냈고, 이를 통해 최초의 여왕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시대가 더해갈수록 폐쇄적인 신분제에 대한 불만은 거세져갔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인재라할지라도 신분제를 뛰어넘어 사회적 진출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특히, 6두품은 경제적 여건과 교육 수준이 높았음에도 주요 관직에 오를 수 없어 당나라 유학, 당나라 관직 진출에 뛰어들게 되는 현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이러한 골품제도에 불만을 품은 지방 귀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키워나갔고 신라의 중앙집권은 약해져갔다.
호족들의 반발과 끊임없는 농민 봉기, 그리고 후고구려와 후백제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운 후삼국시대를 겪었던 신라는 왕건의 고려가 통일을 하면서 그 천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전무후무한 신분제도로 왕권강화를 꿈꿨던 신라.
하지만 단 하나의 왕을 성립하려는 정책으로 수많은 인재들이 좌절했고 최고위층들만의 세상을 만들어버렸다.
신진 세력 차단과 동시에 뛰어난 인재마저 놓친 폐쇄성은 신라를 역사속의 나라로 가둬버린 멸망의 한 원인이었다.
[YTN 사이언스 기사원문] http://www.ytnscience.co.kr/program/program_view.php?s_mcd=0033\u0026s_hcd=\u0026key=201512230934252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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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The day) – ‘골품제 타파’ 한때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궁예.20150315


Title : The day
Website : http://www.kbs.co.kr/1tv/sisa/theday/
Showtime : KBS 1TV SUN PM10:30

역사저널 그날 (The day) - '골품제 타파' 한때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궁예.20150315

신라의 화백회의와 골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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